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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현장

1919. 3. 1

2·8 독립선언 3·1운동의 기폭제

나라안의 자리는 아니지만, 우리나라 3.1운동의 원동력이 된 뜻깊은 자리 이기에 첫 자리로 꼽았습니다.

동경의 기독교청년회관(재일본도쿄조선YMCA 현 재일본한국YMCA)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 ~ 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참여한 사람은 장영규, 최팔용, 윤창석, 김철수, 백관수, 서춘, 김도연, 송계백, 변희용, 강종섭, 이봉수 등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도로 나선 학생들은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선언과 결의를 열광 속에 가격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할 때 일본 경찰들이 들어닥쳐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고
사회자 최팔용 외에 약 60명이 검거되었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에 5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청년회관에서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검거되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과 해외에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태화관 터 독립선언문 선포

최남선이 초안을 작성했다.
일본 제국에 강제로 병합된 조국을 독립시키고자 손병희를 비롯한 33명의 민족대표는
세계 만방에 독립을 선언하고 전국 곳곳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기로 계획을 세웠다.
33명의 대표는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요릿집)에서 회동을 가졌으며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총독부에 자진신고를 하고 투옥된다.
이에 앞서 2월 26일 ‘보성사’에서 2만여 장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2월 28일에 1,500여 장을 학생들에게 분배하고 나머지를 그 밖의 각처와 각 지방에 분배했다.

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탑골공원.
학생과 시민 약 5천명 앞에서 연단에 올라선 '누군가'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라며 독립선언서를 처음 낭독했다.
이후 독립 시위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 시기 나라안 곳곳에 독립운동의 열기가 없는곳이 어디 있었겠으며
이 페이지를 만들며 어디는 중요하여 소개를 하고 어디는 미비하여 소개를 하지 않는 그런 구분을 하기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걸 뒤늦게 깨닳았습니다.

그리하여 지역적으로 대표할만한, 중심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곳, 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볼만한 곳 등등을 추려서 이곳에서 소개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어떠한 관점으로 대표적이고 중심적인 운동을 구분하여야 하는지 나름대로 인터넷을 최대한 뒤져보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추려보기로 합니다.

거기에 딱 하나.
제 사이트의 기본목적인 "여행" 이라는 키워드를 제 개인적인 관점으로 최소한 첨가하여
한번쯤 "여행"으로라도 방문해 볼만한 장소 위주로 페이지를 만들어 봅니다.

괴산장터

충북에서의 1919년 3·1만세운동은 3월19일 괴산장터에서 홍명희(洪命憙·1888~1968)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가 가장 먼저 일어났다고 한다.
1919년 3월 19일, 24일, 29일, 30일 및 4월 1일 등 다섯차례에 걸쳐 괴산군 주민들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유성장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진잠(현 대전시 유성구 진잠동) 현감을 지냈던 무장 출신 '문석봉'이 유성오일장터에서 '국수보복(國讐報復, 나라의 원수를 갚는다)'는 기치를 내세워 의병을 일으켰다.
한 때 1천여 명에 달하는 의병군의 위세는 공주 관아와 회덕 일본군 무기고를 급습하기도 했고,
을미의병의 효시로서 전국 의병봉기를 불러왔다.
또한 1919년 기미년 3월 16일에는 지족리(현 지족동)에 살던 이상수, 이권수 형제가 유성장터에서 장사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연설을 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약 3벽여명이 따라서 함께 만세를 불렀고,
3월 31일과 4월 1일에도 같은 장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아우내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조인원(趙仁元)·유관순(柳寬順)·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 등의 주도로 군중 약 3,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은 3월 31일 밤 자정 병천 아우내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충북 진천 고개마루에서 4월 1일 만세시위가 열릴 것을 알리는 횃불을 올렸다.
4월 1일에는 시장 입구에서 장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권유하였다.

4월 1일 오후 1시 경 조인원이 ‘대한독립’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어 유중권·유중무·조병호(趙炳鎬) 등이 큰소리로 독립만세를 부르고,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행진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병천헌병주재소 헌병 5명이 출동하여 해산에 불응하는 군중들에게 발포하였고,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주도 인사들과 군중들은 순국자의 시신을 주재소로 운구하고 일제 경찰에 강력하게 항거하는 한편, 헌병 및 보조원들과 격투를 벌이며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 만세시위로 10여 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4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수십 명이 체포되어 일제의 악형과 옥고를 겪었다.

기사문리 만세고개 3·1운동 만세시위지

강원도 양양 현북면에서는 4월 7일과 9일에 주민들이 독자적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4월 7일의 운동은 9일의 운동계획이 일부 발각되면서 일어났다.
현북면 원일전리, 장리, 도리의 주민과 서당 생도 300여 명이 양양읍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남대천을 사이에 두고 경찰저지선이 완강하여 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임천리와 용천리에서 만세를 부르며 경찰을 향해 감금자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4월 9일의 운동은 기사문운동이라고 알려져 있다. 양양군내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던 운동으로 기독교인과 유학자 그리고 각 마을의 구장들이 합심하여 전개한 대규모 운동이었다.
주재소에서는 이러한 정보를 미리 입수하여, 8일에 이미 강릉으로부터 지원부대가 도착해 있었다. 일제 군인과 경찰은 주재소 옆 개울 언덕에서 군중을 향하여 총을 겨누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순사 이홍근만이 군중의 선두가 있는 다리목에 나와 있었다.
군중은 이홍근이 만류하는 것을 뿌리치고 만세를 부르며 주재소로 향하려고 했다. 이때 총소리가 나기 시작하였다. 현장에서 9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20명이 나오며 군중의 선두는 피바다가 되었다.

강원도의 3·1운동은 철원 갈말면에서 처음 시작된다.
그러나 인터넷을 뒤져본 결과 그곳은 현재 비석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것으로 보인다.
비록 이곳 뿐만 아니라 많은곳이 이처럼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다.....

물걸리 3·1운동 만세시위지 홍천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공동으로 추진한 4월 1일 홍천장터 만세시위에 몰려든 홍천면과 북방면의 주민 2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500여 명으로 늘어난 군중은 홍천군청, 홍천면사무소로 이동하였다.
뒤늦게 춘천에서 출동한 일제 수비대에 의해 현장에서 33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옥에 갇혔다.
한편 동면에서는 4월 2일 800여 명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헌병이 쏜 총에 민병숙이 즉사하고 민병태도 총에 맞고 쓰러졌다.
격분한 군중은 면사무소를 파괴했으며 수십 명이 검거되어 고초를 겪었다.
물걸리에서는 4월 3일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출동한 헌병의 발포로 8명이 즉사하고 2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그 후로도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다.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 군산 3·5만세 의거

군산영명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김병수는
1919년 2월 민족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매를 전해 받았다.
그는 2월 28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 구암교회 장로에게 전달하고, 3500장을 더 인쇄해 교인은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어 태극기를 만들고 조직을 갖추어 3월 6일에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제보로 계획이 누설돼 4일 새벽 무장 경찰관 수십명이 들이닥쳐 주모자인 박연세와 이두열을 잡아갔다.

5일 영명학교 교사 김윤실 김수영 고석주와 학생들은 석방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군산경찰서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영명학교 학생 70명 가운데 반 이상이 유치장에 갇혔다.
그러나 만세 시위는 영명학교와 구암교회 성도 등 500여명이 합세하면서 군산 전역으로 번져갔고 3월 말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입학 거부에 이어 학교에 불을 질러 일본 경찰을 놀라게 했다.

군산에서는 그해 3월에서 5월까지 총 21차례 의거가 일어났고, 2만5800명이 참여했다.
21명이 목숨을 잃었고 37명이 실종됐으며 145명이 부상했다.

익산 3·1운동 기념공원

1919년 4월 4일, 장날을 맞아 300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군중들은 한 남자의 지휘 아래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지고 태극기를 휘날리며 행진한다.
만세 소리가 횟수를 더해갈 때마다 점차 군중들이 늘어났고
그 수는 어느덧 1천 여 명이 되었고 그 기세가 오르자 헌병대가 출동하여 이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만세 소리는 더욱 커졌고, 헌병대는 소방대와 일본인 농장원들까지 동원하여 각종 흉기로 진압을 시도한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지휘를 하던 남자는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군중의 앞으로 나아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시작한다.
그러자 당황한 일본 헌병이 칼을 휘둘러 남자의 오른손을 자른다.
하지만 남자는 쓰러지지 않고 왼손으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전진한다.
이에 일본 헌병이 왼팔마저 베어 버리자, 그는 두 팔을 잃은 몸으로 뛰어가며 만세를 불렀다.
격분한 헌병은 쫓아가 그의 몸을 난자하였고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남자는 외쳤다.
“여러분! 여러분! 나는 이 붉은 피로 우리 대한의 신(新)정부를 음조(陰助)하여 여러분으로 하여금 대한의 독립된 국민이 되게 하겠소.”
결국 남자는 순국하고,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무자비한 총격에도 앞으로 나아갔다.

익산지역의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수피아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

1919년 2월 중순경 김마리아(金瑪利亞)가 동경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양림리에 사는 언니 김함나(남궁혁의 부인)에게 전해주었고,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광주의 3·1운동 준비모임이 이루어졌다.
수피아여학교 교사 박애순(朴愛順)은 학생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독립선언서 약 50매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3월 10일 수피아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만세시위를 선도하며 부동교 아래 작은장터를 거쳐 광주경찰서 앞까지 행진하였다.
당시 광주 3.1만세운동에 참여한 수피아여학교는 윤형숙 열사를 비롯하여 교사와 학생 26명이 전원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다.

윤형숙 열사의 묘

위의 수피아여학교의 정보를 살펴보다 새롭게 알게된,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열사 한분을 부끄럽게도 이제나마 알게되어 이곳에 포함시켜 봅니다.
이렇듯 알려지지 않고 사라져가는 수많은 애국 지사, 열사, 의사 분들을 후세에 잊혀지지 않고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겠습니다.

1919년 1월 20일 오전 6시, 서울로부터 고종황제의 승하 소식을 전해들은 수피아여학교는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 독살에 대해 분개하고 있었다.
이에 윤형숙 등 학생들은 1919년 3월 10일 오후 2시, 광주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이날 만세시위에는 수피아여학교를 비롯하여, 숭실학교생, 기독교인, 농민, 시민 등 1천여 명이 참여하였는데 일제는 기마헌병을 투입하여 시위자들에게 위해를 가하며 체포에 열을 올렸다.
이 자리에서 윤형숙 열사는 태극기를 든 왼손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는 비극적인 운명과 마주치게 된다.
이러한 큰 부상을 입은 윤 열사는 주동자로 잡혀가 옥고를 치르다 1919년 4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는다.

대구3·1운동 대구 학생의거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전개되었으며, 영남 3·1운동의 효시(嚆矢)로 학생들 주동으로 일어났다 하여 ‘학생 의거’라고도 한다.

서울에서 3·1운동의 거사 준비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을 때, 이곳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李萬集)·이상백(李相佰)·백남채(白南埰) 등은 경상도의 연락책임을 맡은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들었다.
그 뒤 3월 2일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 이용상(李容祥)을 통해 「독립선언서」를 입수. 그리고 같은 교회의 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8일 서문외(西門外)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계성학교(啓聖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과 연도의 주민·기독교인·천도교인 등이 가세하여 군중의 수는 1,000여 명이 되었다.
만세시위 대열이 경찰서를 지나 달성 군청 앞에 이르렀을 때, 기관총 5, 6대로 무장된 일본 헌병 및 경찰에 의해 시위대는 저지되었다.
그리고 이 때 157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동래 만세거리

동래지역은 부산의 항일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1919년 3월 4일 서울에서 연락책인 김법린(金法隣)과 김상헌(金祥憲)이 범어사로 내려와 승려들과 청련암에서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한 후, 3월 7일 동래 장날에 맞춰 30여 명이 시장 중앙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다.

3월 17일 범어사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 모임에서 18일 새벽 동래시장 인근 불교포교당(현 동래구청 내로 추정)으로 집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밀고로 실패하였다.
18일 밤 40여명의 범어사 학생들이 동래읍성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르기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자진해산하였다.
또 19일에는 범어사 학생들이 3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3.1운동 경상북도 시발지 기념공원

의성군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발로 안평·봉양·장곡·신명·춘산면에서 4월 초까지 전개되었다.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던 김원휘가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곧바로 귀향하여 3월 6일 쌍계동 교회에서 박영달을 만나 서울·평양 등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하면서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할 것을 촉구하고, 이튿날 안평면 괴산동교회 목사 박영화에게 평양의 상황을 알리고 함께 시위운동을 주도할 것을 상의한다.
그리고 3월 8일에 일어난 대구 3.1운동을 목격한 뒤 3월 10일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대구 계성고등학교 학생인 박상동(박영화의 아들)·박영신·배달근·배중엽 등 기독교 청년들이 가담, 이들과 함께 3월 12일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한다.

한편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 우희원 등은 3월 11일 비안 장날에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했으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12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3월 12일 만세시위를 계획했던 4명의 주동자들이 교장실로 불려가자, 150여 명의 학생들은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출동한 일본 경찰과 교사들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주동 학생은 체포되었다.
일부 학생들은 이날 오후 1시경 비안면 쌍계동으로 가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그곳의 만세시위운동에 참가한다.

기독교인들은 12일 박영신의 집에서 태극기 200여 장을 제작해, 정오에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00여 명의 군중에게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동리를 시위행진한 후 뒷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3일과 16일에도 비안면 동부동에서 김석근 등의 주동으로 약 1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러한 시위 소식이 박영화를 통해 안평면 대사동 교회에 전달되자, 김옥돈 등 대사동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3월 15일~19일에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봉양면 도리원에서는 대사동 교회 집사였던 이양준이 3월 19일 도리원 장날을 기해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안평 주재소로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도리원 장터로 행진했다.
여기에 대사동의 해산 군중도 가담하여 시위 군중은 수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죽고, 6명이 부상당했으며, 다수의 시위 군중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점곡면에서는 16~20일, 의성읍에서는 3월 18일, 신평면 덕봉동에서는 3월 25일에 각각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조천 만세동산

제주 조천 만세운동은 3월 16일 당시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 학생이었던 김장환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면서 구체화되었다.
그는 제주 조천 출신의 항일운동가 김시학의 아들이며
숙부 김시범에게 3·1운동의 상황을 이야기 하였고 이를 듣게된 김시범은 제주에서의 만세운동을 결심하게 된다.
김시범은 김시은·김장환과 함께 제주의 유림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던 김시우의 기일인 3월21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운동을 알리고 동지를 규합하였으며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한다.
3월 21일 아침 조천리 미밋동산에
김시범·김시은·고재륜·김형범·김연배·황진식·김용찬·백응선·김장환·박두규·이문천·김희수·김경희·김필원 등의 14인 동지와
김순탁·김시희·김백능·부병각·김종호·한석영·한석화·심동인·한백흥 등 모두 23인의 거사동지,
그리고 조천리 주민과 인근 함덕·신촌·신흥 등지의 서당 생도 등 약 150여명이 모인다.

김필원의 혈서로 ‘대한독립만세’를 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조천지서 서쪽에서 미밋동산을 향해 행진하는 것을 본 주민 500여명이 동참한다.
오후 3시경 미밋동산에 태극기를 꽂고 김시범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김장환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고 조천 비석거리를 지나 제주 성내까지 행진키로 하였으나 신촌리에서 경찰과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이 충돌로 3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김시범과 김시은 등 13인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1차 조천만세운동이다.

이 이후에 조천만세운동은 군중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조천장터에서 지속적으로 4차까지 전개된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3·1운동에 얽힌 민족의 애환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 수십 수백곳 이겠지만
많은곳이 흔적도 찾아볼수 없이 바뀌어져 있고
비석하나 세워져있지 않은 곳 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시간과 여유가 되면 그러한 곳 들을 따로 찾아다니며
이곳에 기록을 더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밖에도
해외 교포들의 독립운동 활동과 사적지에 대한 정보는
아래의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사이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rt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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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horangi.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