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천하의 옳고 그름이 흐트러지고
각 나라의 어른자리에 간사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온 땅에 백성들의 곡소리가 넘쳐나던 시절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사람다운 삶을 살자고 일어난 혁명.
동학 농민혁명의 발자취를 되짚어 봅니다.

만석보(萬石洑址) 동학 농민혁명의 시발지

사진출처 : 문화재청
사발통문

너른 평야에서 1만석이나 되는 많은 쌀을 거둬들일 수 있다하여 '만석보'라 이름하였지만,
1892년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횡포로
굶주리고 착취당해야 했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곳이다.

농민들은 우선 억울한 사정을 민소(民訴)의 형식으로 군수에게 진정하기로 하고,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군수 조병갑에게 두 차례에 걸쳐 호소하였으나
오히려 곤장을 맞고 옥에 갖히는 등 횡포를 당하게 된다.
이에 전봉준을 필두로 한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불법으로 수탈되었던 수세미(水稅米)를 되찾아 농민에게 돌려주고는 동시에 일단 해산하였다.

무장(茂長)기포

무장 포고문
무장기포 상상도. 출처:인터넷
드라마 녹두꽃

조정에서 고부농민봉기를 수습하고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李容泰)의 이어지는 가혹한 탄압에 견디지 못하고
무장(茂長)지역으로 피신한 전봉준과 일행들은
무장지역 동학접주 손화중과 손을잡고
본격적으로 이번의 거사는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에 있음을 천명하는 창의문을 발표하고
혁명군 봉기를 하게 된다.

무장현 관아와 읍성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백산성

사진출처 : 천도교 홈페이지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라.
"무장"에서 농민봉기를 선포하고 "고부"로 진격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농민군들이 집결한 "언덕"이다.
손에손에 죽창을 든 농민들이 언덕에 모이니
그 언덕이 "백산"이 되었으며
그 주변에 죽창을 세워들고 모여 앉으니 그 주변이 "죽산"이 되었다.

황토현

사진출처 : 한국관광공사

대규모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격전지.
동학 농민군은 이곳 황토현 전투에서의 승리를 발판으로
고부관아를 점령한뒤
그 위세를 펼치게 된다.

황룡촌 전투

사진출처 : 인터넷

황토현에서 대규모의 감영군(지방군)이 대패하자
조정에서는 경군(정부군)을 파견하게 된다.
신식무기를 장착한 경군을 맞아
농민군은 대나무로 만든 병아리우리 모양의 커다란 장태로
황룡촌에서 경군과 맞서 또다시 승리를 하게된다.

전주성 입성

사진출처 : 인터넷

용머리고개를 지나 삼천, 완산칠봉을 거쳐
드디어 전주성에 입성을 하게 된다.
이에 조정에서는 혁명군을 상대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게 되고
왜(倭) 역시 이 기회를 틈타 스스로 군대를 파견하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전봉준은 청과 왜에 이나라 안에서의 군대주둔의 빌미를 주지않기 위해
혁명군 해산을 결정하고 해산의 조건으로
민생개혁을 위한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한다.
조정은 이를 받아들였고 동학 농민혁명군은 비로소 해산하게 된다.

삼례봉기

농민 혁명군이 해산되고
얼마되지 않아 왜군의 경복궁 점령과 친일정권 수립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왜군을 몰아내기 위해 전봉준은 또다시 삼례를 기점으로 민초들의 군대를 조직하게 된다.
삼례에서 전열을 정비한 혁명군이 서울을 향해 북진을 시작하자
충청, 강원, 경기, 경상북부 지역에서도 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우금치 전투

사진출처 : 인터넷

서울을 향해 진격하는 농민군과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군과 왜군은 공주 우금치 일대에서
격전을 벌이게 된다.
10월부터 11월에 걸친 두차례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크게 패하고 만다.
그 뒤로도 뿔뿔이 흩어진 농민군들은
논산 황화대, 김제 금구, 원평 등지에서 끈질기게 항쟁을 계속 하였으나
전세를 뒤집지는 못하였다.

전봉준 장군 피체지

우금치 전투에서 패한 동학 농민군이 또 다시 태인 전투에서 패하자
전봉준 장군은 부하 몇 명을 데리고 정읍 입암산성을 돌아
노령산맥을 넘어 12월 2일 쌍치면 금성리 피노마을에 거주하고 있던 옛 부하 김경천을 찾아왔다.
그러나 믿었던 부하 김경천은 전봉준 장군을 밀고했고,
이로써 전봉준 장군은 관군에게 붙잡히게 되어 결국
1895년 3월 3일 농민이 주인 되는 세상의 꿈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녹두꽃은 떨어졌다.

전봉준 생가터

1855년 12월 3일 이곳 고창읍 죽림리 63번지 당촌 마을에서 서당 훈장을 하던 전장혁의 아들로 태어나 13세 무렵까지 살았다.
당시에는 서당, 안채, 사랑채 등이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 기간 중 모두 소실되었다.
그는 오척 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어 일명 녹두장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운사 마애불

사진출처 : 위키백과

고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무르익던 무렵,
“미륵부처님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는데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
는 말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이에 1892년(고종 29) 8월 어느 날, 동학 정읍대접주인 손화중(孫華仲)의 접중(接中)에서, 민중을 구원할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륵의 비기가 반드시 필요하며 지금이 바로 비기를 열어볼 때임을 결의하였다.
이에 동학도 300여 명이 도솔암으로 올라가서,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로 임시가교를 만들어 암벽에 올라간 뒤 비기를 꺼내었다.

그후 미륵의 비기에는 “이조 500년 후에 미륵석불의 복장을 여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 비기가 세상에 나오면 나라가 망할 것이요, 그러한 후에 다시 새롭게 흥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기를 꺼내었는지 또는 그 내용이 어떠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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