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益山)은
백제 무왕(武王)의 전설이 곳곳에 배어있는 곳입니다.
무왕의 전설을 따라 익산의 여기저기를 구경해 봅니다.


익산시 캐릭터 서동과 선화공주

무왕(武王, 580년 ~ 641년)
재위 : 600년 ~ 641년 음력 3월)
백제의 제30대 국왕이다.
성은 부여(扶餘), 휘는 장(璋), 아명은 서동(薯童) 혹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다.

무왕의 출생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무왕을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는 과부의 아들이라고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무왕을 못가에 사는 여인의 자식이라고 전하며,
무왕의 어머니는 못가에 사는 과부였는데 어느 날 못에서 검은 용이 나타나 과부와 통정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전한다.
그 아들이 자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용기가 있었는데 그가 왕위에 올라 무왕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 익산에는 무왕이 연못에서 사는 용의 아들이라는 탄생 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예로부터 "용"이란 존재는 권력자를 일컫는 상징이었다.
왕이 아니어도, 적어도 그 지방의 권력자를 생각해 볼수도 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둘의 내용을 합해서 생각해도 무리는 아닐것 같다.

서동생가터 마룡지

서동생가터는 금마사거리에서 서측으로 500여m 거리의 722번 국도와 연동제 사이에 위치해 있다.
1980년대 초, 주변의 건축공사 과정에서 우연히 일대의 흙을 채취하면서 백제 왕궁에서 사용하던 것과 같은 기와편과 초석이 다수 발견되었다.
2011년에도 왕궁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와 같은 종류의 토기편(뚜껑)이 연못(마룡지)둑에서 수습되어 ‘서동생가터’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출처 : 익산시 문화관광

[내용추가]

2023년 3월 24일 문화재청의 발표에 따르면,
부여, 공주등 왕도(王都) 에서만 발견되던 저온 저장고 시설이 발견됨에 따라
서동 생가터 또는 왕궁과 관련된 자리로서의 증거가 더욱 뚜렸해지고 있다.

무왕은 이곳에서 어린시절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마동(맛동), 또는 서동(薯童)이라 불렸다.

오금(五金)산

사진출처 : 익산시 페이스북

느끼진다......... 😭😭😭


서동이 마를 캐어 홀어머니를 봉양할 때, 이 산에서 금 다섯 덩이五金를 얻은 곳이라는 유래가 전한다.
산의 정상부에는 백제때 만들어진 토성이 있으며, 남쪽 기슭에는 왕이 된 서동이 어머니를 위해 지었다는 오금사가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익산시 문화관광

《신증동국여지승람》- ‘오금산 남쪽 백여 보 되는 자리에 연못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서동대왕의 어머니가 축실했던 곳이라 한다.’


"서동설화"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에 보면,
서동요사건(?)으로 궁에서 쫓겨난 선화공주는 왕후가 챙겨준 금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금을 서동에게 보여주니 서동이 하는말.
"뭐 이딴 쓰잘데 없는걸 무겁게 들고왔데~ 이런건 저 뒷밭에 땅파면 수없이 나와서 버리는건디....."
"아~ 그짝 동네에서는 이런걸 좋아하나부네~" 하며
알고지내던 법사에게 부탁하여 뒷밭 한켠에 쌓아놓은 금덩이를 하룻밤 사이에 처가(신라왕궁)에 옮겨놓았다고 한다.....

왕궁리 유적

사진출처 : 익산시 문화관광

익산시 왕궁면에 위치한 유적지.
지역 이름부터 "왕궁"이며 백제의 "익산천도설"의 중요한 배경지 이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별도(別都)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의 가능성을 같이 보고 연구중이다.


[익산천도설의 시대적 배경]
사비시대의 백제 귀족들의 힘이 왕(무왕)을 위협하는 상황까지 놓이자
무왕은 사비세력을 견제할 필요를 느끼고 자신의 고향인 익산지역의 세력들을 규합하려고 하였다.
또한 농업 생산력이 충분한 비옥한 땅, 금강을 통한 해상교통의 수월성, 지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를 견제하기 유리한 위치 등을 고려하여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했을 가능성이 높다.


1989년부터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내용에 의하면
백제 말기 왕궁으로 조성되어 일정기간 시용된 후
왕궁의 중요 건물을 철거하고 탑과 금당, 강당 등 사찰이 들어선 복합유적으로 밝혀졌다.

미륵사

선화공주와 혼인한뒤 왕이된 무왕은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 연못에서 미륵삼존이 출연하자
이곳에 사찰을 짓고싶다는 선화공주의 청을 들어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지었다고 하며
신라에서도 사람을 보내 건축을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발굴된 유물(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사택적덕의 딸 백제왕후"가 시주하여 사리를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면서
미륵사를 선화공주가 세웠다는 전설이 바뀌게 될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미륵사에 현재 남아있는 서탑, 그리고 새로 복원하여 조성한 동탑 말고도 중앙에 중앙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리고 무왕의 왕비가 선화공주, 사택적덕의 딸 말고도 여럿이었을 것이므로
왕비들이 함께 시주하였을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며
그래도 사찰건축의 주체는 선화공주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궁남지

사진출처 : KBS대전 개국 73주년 특집 프로그램 ‘백제정원 궁남지’ 화면 캡처

삼국사기』 “백제 무왕 35년(634) 궁의 남쪽에 못을 파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채우고, 주위에 버드나무를 심었으며, 못 가운데는 섬을 만들었는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상징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현재 공식적으로 충남 부여군에 있는 "부여 궁남지"를 무왕이 조성한 궁남지로 정하고 있다.

부여 궁남지

1990년부터 현재까지 9차에 걸쳐 조사가 수행되었으며 조사 결과 사비시대에 조성된 인공수로, 목조저수조, 우물지와 도로유구, 수정 경작지, 토기 가마터, 굴립주건물지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되었고, 6~7세기와 3~4세기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그러나!........

KBS대전총국은 지난 3일 개국 73주년 특집으로 ‘백제정원 궁남지(연출 심각현)’를 기획, 방송했다.
제작과정에서 많은 전문가들은 현재 궁남지가 진짜 위치가 아니며, 역사적 고증이 없는 추측에 의한 재현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故홍사준 부여박물관장의 부탁에 의해 재정을 지원, 현재 궁남지를 만들었다고 증언해 현대에 조성된 정원임을 재 확인시켰다.

출처 : 인사이트 부여 2016년8월6일자 기사

그리하여 익산지역 에서도
궁남지는 왕궁리 일원에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을 가지고 발굴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도 뉴스기사 이후 자료를 찾아보기 힘든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업이 중단된것(?) 같다.)
하여, 익산에도 "궁남지"가 있다.
미륵사지 가까운 곳에 조성된 "서동공원" 안에 "궁남지"가 조성되어 있다.

(실제 궁남지가 아니고, 가칭이다.)

쌍릉

봉분이 동서로 약 200m의 사이를 두고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의 능은 '대왕뫼'라 불리며, 서쪽의 능은 '소왕뫼'라 불린다.
지역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마한(馬韓)의 무강왕(武康王)과 그 왕비의 능이라고도 하며,
또는 백제 무왕(武王)과 선화비(善花妃)의 능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1917년 발굴조사 결과
그 구조는 원분(圓墳)으로 부여 능산리(陵山里)에 있는 백제 왕릉과 동일 형식에 속하는 판석제 굴식돌방으로 밝혀졌다.
돌방의 특징은 7세기 백제 말기 부여시대의 형식임을 감안하면
무왕과 왕비의 능묘일 가능성이 높다.

사진출처 : 문화재청

일제가 발굴하면서 모든 유물들이 사라진 지금
2017년도 재발굴 조사당시 석실 끝부분에서 일제가 미처 가져가지 못하고 남겨진 인골조각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는데
남아있는 뼈조각을 분석한 결과
7세기에 사망한 161cm ~ 170cm의 50대 이상의 남성으로 확인되어 무왕의 묘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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