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書院)은 조선시대 성리학(性理學) 교육 시설의 한 유형으로,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에까지 향촌 지식인인 사림(士林)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중국으로 부터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던 성리학이 지역화되고 변형되어가는 톡특한 과정을 통합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제향공간, 강학공간 뿐만 아니라 주변의 경관 지형들 또한 유산구역으로 지정되어
서원을 돌아보며 옛 선비들의 품격과 풍류를 느끼고
도시의 찌든 냄새를 잠시나마 털어내는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소수서원 영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 내린 사액서원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안향(安珦)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중종 38년(1543)에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하였다.
명종 5년(1550)에는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중종 39년(1544)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제사지냈고, 인조 11년(1633)에는 주세붕을 더하여 제사지냈다.

남계서원 함양

정여창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지방민의 유학교육을 위하여 조선 명종 7년(1552)에 지었다.
명종 21년(1566)에 임금으로부터 ‘남계(?溪)’라는 사액을 받았고,
정유재란(1597)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선조 36년(1603)에 나촌으로 옮겨 지었다가,
광해군 4년(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다시 지었다.

옥산서원 경주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으로부터 ‘옥산(玉山)’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도산서원 안동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이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필암서원 장성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처음 세워졌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도동서원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문경공 김굉필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원년(1568) 처음 세워 쌍계서원이라 불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져 선조 37년(1604)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지었고 선조 40년(1607)에 임금님이 직접 도동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 안동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에서 비롯되었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의 추천으로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屛山書院)’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무성서원 정읍

신라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재위 1506∼1544)때 관리였던 신잠(申潛)을 모시고있는 서원으로,
원래는 태산서원이라 하던 것을 숙종 22년(1696)에 임금으로 부터 이름을 받아 무성서원(武城書院)이라 하게 되었다.

돈암서원 논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이 타계한지 3년 후인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다.
처음에는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뒤 위패를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이루었다.
서원 서북쪽에 있던 큰 바위의 이름을 따 서원의 이름을 돈암(遯巖)이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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